못 쓰겠다던 사람이 나가면 안 되는 사람이 되기까지

“팀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이직하려고요.”
“이작가대리! 1년은 더 있기로 했잖아!!”

여의도 IFC의 높은 건물, 멋있어 보이는 증권가 거리.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버티기 바빴던 증권사 생활.

꿈에 그리던 증권사 이직에 성공했다.
매출로는 국내 탑으로 유명한 곳. 반대로 사람 갈아넣기로도 유명한 곳.

부푼 마음을 안고 들어간 증권사 IT실은 내가 상상하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무실의 모두가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보다 연차 낮은 신입들조차.

내 PC가 세팅되는 동안, 할 것이 없던 나는 담배를 피러 나갔다.
아무 일도 없는 내가 담배를 피러 가는 게 너무나 눈치 보였다.
이것이 첫 출근날 느낀 기분.

그들처럼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해외선물 프로젝트 구축 중간에 입사한 나는 바로 야근을 해야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아키텍처에 적응해야 했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해야 했다.
해외 시차에 적응해야 했다.
새벽에 걸려오는 문자와 전화를 못 받으면 안됐다.
고객 클레임이 걸려오니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파트장이 날 불렀다.

“너 4년 차로 입사했는데, 내 기준으로 넌 아직 여기 2년 차밖에 안돼.”
“이런 식으로 하면 내 팀에서 너 못 데리고 있으니까 알아서 해라.”
“못 쓰겠다 싶으면 긴 말 안한다.”


이 정도 해도 동기들만 못하다고?
갈아넣은 시간이 부족했나?
얼마나 더 해야 기대에 충족할 수 있을까?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고 23시 퇴근하는데.
잠을 더 줄여야할까?

그나마 의지하던 사수가 퇴사했다.
당연히 신규 개발과 장애 대응은 오로지 내 몫.

잦은 위경련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이상하다. 술을 그렇게 먹어도 내 위장은 괜찮았는데.

새벽 4시. 업무지원팀에서 내 장애대응을 기다린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고맙게도 사수께서 연락을 주신다.

“사무실로 가까? 혼자 할 수 있겠어?”
이 정도도 못하면 메인담당 못 해먹죠.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모니터를 멍 하니 바라본다.
솔직히 나 혼자 못할 것 같았다.

부담감을 이기기 위해 줄담배를 피워본다.
한숨 한번 쉬고, 캔커피 한잔 들이켜고.

시간에 쫒기며 장애를 혼자 처리한다.

가까스로 장애를 처리한 후, 세수를 하고 온다.

바로 업무를 시작한다.
밤을 새웠건 말건 그 누구의 칭찬과 격려도 없다.
8시는 업무시작시간이니까.

당연한 거니까.

나를 고통스럽게 대하던, 그러면서도 신경 써주던 파트장.
파트장이 어느 날 나에게 설계에 대해 묻는다.

“이 데이터는 이런 식으로 처리해보는 게 좋겠는데. 이작가대리 생각은 어때?

불과 몇 달 전까지 2년차 취급받던 나에게 파트장께서 설계를 다 물어보시네.

사수 없이 굴렀던 시간이 도움이 되긴 했구나.

차가운 커피를 들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생각해본다.
“시간을 헛되이 갈아넣진 않았나보다.”

동기들이 잘 대해주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이직 후 1년간은 서로에게 관심들이 없었다.
본인들 살기도 바빴고, 나도 잘 못했으니까.

어느 순간 나에게 담배와 커피를 권하며 사과하던 동기들.
내 고마운 존재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의지하며 버틴다.

헤드헌터로부터 이직 제의가 왔다. 국내 유명한 중개사라고 한다.
증권사는 대고객 서비스가 중심이다 보니, 연결된 기관의 수가 한정된다.
중개사라면 연계된 기관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을거다.

회사 규모는 작아지겠지만, 더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겠지?

나에게 그나마 잘해주시던 팀장님께 퇴사를 이야기했다.
불같이 화를 내신다.
분노보다는 배신감에 가깝다.

이해한다. 아직 제대로 된 사수가 없는데 그나마 할 줄 알던 내가 나간다고 하니까.
1년은 더 있으라 하셨지만, 이 곳에 더 있기엔 아까운 기회다.

동기들이 축하파티를 해준다.
“형 자리 나면 꼭 연락해요.”
“나 혼자만 꿀 빨란다. 수고들 해라. ㅋㅋ”

첫 퇴사와 느낌이 달랐던 두 번째 퇴사.

내가 여기서도 살아남았다.
버티고 버텨서 한번 더 다음 스텝으로 올라간다.

늦은 시작이었던 만큼
회사에서의 모든 시간이 간절했던 만큼
내가 버텨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던 어느 한여름 밤.

화려한 건물과 멋있어 보이는 증권가 거리는 더 이상 나의 거리가 아니다.

새로운 회사에서는 과연 어떤 시간을 보낼까.
그곳에서는 얼마나 나를 증명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래도 간다.

한 번 더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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